치이카와 극장판을 봤다. 아주 재미있었고, 이야기가 굉장히 일본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모노노케 히메를 봤을 때도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 특히 인간이 이해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존재를 대하는 태도에서 그렇다.

치이카와와 친구들이 바다와 섬을 배경으로 모여 있는 치이카와 극장판 포스터
〈映画ちいかわ 人魚の島のひみつ〉 극장판 포스터. 출처: 영화 공식 사이트. © ナガノ/2026「映画ちいかわ」製作委員会

노자의 도덕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여기서 짚으로 만든 개는 제사에 사용되는 물건이다. 제사 때는 귀하게 다루지만 의식이 끝나면 버려진다. 자연은 인간을 특별히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인간의 행복이나 불행과 무관하게 존재하고 작동한다.

모노노케 히메의 시시가미가 그렇다. 시시가미는 생명을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한다. 숲은 아름답고 신성하지만 동시에 위험하다. 인간을 해치는 자연이 반드시 악한 것은 아니며,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자연이 반드시 선한 것도 아니다. 자연은 인간의 도덕적 판단과 무관하게 존재한다.

치이카와에서도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귀엽고 연약한 존재들이 살아가는 세계에는 그들을 위협하는 거대한 존재들이 있다. 하지만 그 존재들을 인간의 관점에서 악하다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들에게도 나름의 욕망과 생존 방식이 있다. 서로 다른 존재의 삶이 충돌할 뿐이다. 어느 한쪽의 사정을 이해한다고 해서 다른 쪽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런 세계관이 나오는 배경에 일본의 자연환경이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일본은 지진과 쓰나미, 태풍, 화산 활동처럼 인간이 통제하기 어려운 재난을 오랫동안 경험해 온 곳이다. 나는 일본 알못이지만, 반복되는 재난의 경험이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어렴풋한 느낌이 있다.

자연 재해에는 악의가 없다. 지진은 누군가를 벌하기 위해 일어나지 않는다. 선량한 사람이라고 피해를 입지 않는 것도 아니고, 재난의 원인을 이해했다고 해서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도덕이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재난은 특별한 종류의 공포를 만든다.

영화 링, 주온, 착신아리 등 일본의 공포영화에서도 비슷한 공포를 느낀다. 사다코의 저주에는 원인이 있지만, 그 원인을 알아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죽은 사람의 사연을 이해하고 억울함을 풀어주면 저주가 끝날 것이라는 기대는 무너진다. 저주는 인간이 납득할 수 있는 도덕적 질서에 따라 작동하지 않는다. 사다코의 사연에는 인간적인 비극이 있지만, 저주 자체는 인간의 사정에 무관심한 현상에 가깝다.

서구의 공포영화에서는 일반적으로 문제의 원인을 알아내는 일이 해결로 이어진다. 악당의 동기를 이해하고, 오해를 풀고, 잘못을 바로잡으면 세계는 다시 질서를 회복한다. 대표적으로 좀비. 좀비는 아주 위험하지만 대가리를 다 터뜨리면 해결이 가능하기도 하다. 반면 일본의 공포영화에선 좀 다르다. 이해와 해결이 별개의 문제로 남는다. 원인을 알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 애초에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처벌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일본의 신토에서 신은 반드시 선하거나 자비로운 존재가 아니다. 자연의 여러 현상에 깃든 신성은 때로 인간에게 풍요를 가져다주고, 때로는 재앙을 일으킨다. 인간은 그런 존재를 숭배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한다. 자연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감정이 자연의 위험성을 부정하는 태도로 이어지지 않는다. 불교의 무상관 역시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모든 것이 변화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연결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세계관이 반드시 비관적인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치이카와의 세계는 위험하고 부조리하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은 여전히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친구와 시간을 보낸다. 세계가 자신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과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은 모순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계속 넓혀 왔지만, 여전히 설명할 수 없거나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마주한다. 그럴 때 우리는 원인을 찾고 책임을 물으며, 사건에 어떤 의미가 있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모든 사건에 인간이 납득할 만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치이카와를 보면서 느낀 일본적인 감각은 이런 태도에 가까웠던 것 같다. 거대한 존재가 반드시 악한 것은 아니며, 작고 연약한 존재가 반드시 보호받아야 할 이유도 세계 자체에는 없다. 그저 서로 다른 존재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다치고, 누군가는 살아남는다. 좀 슬프지만 그게 또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를 돌보는 일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계가 우리의 사정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서로의 사정을 헤아리는 일이 중요해진다. 치이카와의 친구들이 서로를 돕는 이유는 세계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서로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인간에게 친절할 의무가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할 수 있다. 우리도 치이카와처럼 타인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치이카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치이카와야~ 울지 말고 오래오래 행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