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을 승인하는 조직
Anthropic이 LLM 학습을 위해 수백만 권의 서적을 구매하고, 제본을 절단해 스캔한 뒤 원본을 폐기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프로젝트 파나마(Project Panama)’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이 작업에는 수천만 달러가 투입되었다고 한다. 별개로 불법 복제 사이트에서 대량의 서적을 확보한 사실도 저작권 소송 과정에서 드러났다.1
당연하게도, 이에 대한 비판이 어마어마하게 제기되고 있다. 저작권자의 동의 없이 저작물을 AI 학습에 활용하는 문제부터 물리적인 서적을 대량으로 파괴하는 행위에 대한 거부감까지,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이 사건은 꽤 화제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앞다투어 비판하는 사건이다보니, 비판 말고 다른 관점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 흥미를 가장 끌었던 건 이렇게 위험한 프로젝트를 누군가 제안했고, 조직이 그것을 승인했으며, 실제로 거대한 규모로 실행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행위를 옹호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 조직의 실행력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시점에 조직 내부의 누군가가 대량의 서적을 확보하여 디지털화하자는 아이디어를 제안했을 것이다.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 회사이니, 저작권 분쟁과 사회적 반발의 리스크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프로젝트의 규모를 생각하면 이러한 위험을 인지하고도 추진을 결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놀랍다.
만약 한국의 대기업에서 비슷한 아이디어가 제안되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법적 위험은 없는지, 다른 기업의 선례는 있는지, 비용 대비 효과를 입증할 수 있는지, 문제가 발생하면 누가 책임질 것인지, 대표님이 국정감사 끌려갈 사안은 아닌지 등의 질문이 먼저 나왔을 것이다. 모두 합리적인 질문이다. 실제로 이런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면 반드시 검토해야 하는 문제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각각의 질문이 합리적이라는 사실과, 그러한 질문을 거쳐 만들어지는 조직의 의사결정이 언제나 합리적이라는 사실은 별개의 문제다. 모든 불확실성이 해소되어야만 프로젝트를 승인할 수 있다면, 불확실성이 큰 프로젝트는 애초에 시작하기 어렵다. 새로운 시도를 해야만 그 효과를 확인할 수 있는데, 효과를 사전에 증명해야만 새로운 시도를 허락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그 성과는 조직의 것이 된다. 반면 실패하거나 사회적 논란이 발생했을 때,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추진한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부담은 매우 크다. 성공했을 때 얻는 개인의 보상에 비해 실패했을 때의 불이익이 지나치게 크다면, 위험한 제안을 하지 않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다.
이는 구성원 개인의 도전정신이나 창의성에 관한 문제라기보다 조직이 위험과 책임을 어떻게 분배하는가에 관한 문제다. 아무리 뛰어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라도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면 굳이 실행에 나설 이유가 없다.
문득 교과서에서 읽었던 허생전이 떠오른다. 북벌을 추진하던 이완은 허생에게 계책을 구한다. 허생은 북벌을 위해 인재를 등용하고, 기득권층의 재산을 내놓게 하고, 청나라의 복식을 받아들여 사람들을 보내는 등의 방책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완은 왕의 권위와 사대부의 체면, 기득권과 예법 등을 이유로 모두 어렵다고 답한다. 분노한 허생은 이것도 어렵고 저것도 어렵다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꾸짖는다. 맞는 말이다.
이완의 입장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왕에게 저런 제안을 가져간다고 생각해보자. 목이 떨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이 장면에서 풍자하는 대상은 분명하다. 북벌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내세우면서도 정작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들이 감수해야 할 변화는 받아들이지 않는 조직이다.
파괴적인 성과를 바라는 조직은 많다. 그러나 그에 따르는 위험을 조직이 짊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는 다른 문제다. 기존의 질서를 바꿀 만한 성과를 요구하면서도 의사결정은 기존의 선례를 따라야 하고, 실패 가능성은 최소화해야 하며, 문제가 발생했을 때의 책임은 실무자가 감당해야 한다면 그 조직이 실제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혁신을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혁신의 결과만을 원하는 것일까?
걱정이 되어 다시금 강조하지만, 앤트로픽의 행보를 옹호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미국 기업이라고 모두 이런 프로젝트를 승인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 기업이라면 반드시 거절했을 것이라고 단정할 근거도 없다. 앤트로픽의 판단이 과연 위험에 상응하는 성과를 가져왔는지 역시 별도로 평가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조직의 실행 능력에 관해 생각하게 한다. 개인이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더라도 거대한 규모의 프로젝트를 실행하려면 누군가는 예산을 승인해야 하고, 실패의 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하며,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개인이 아닌 조직이 책임을 분담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뛰어난 성과를 낸 조직의 구성원이 얼마나 우수하고 도전적인지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러한 성과를 가능하게 한 조직의 의사결정 구조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적게 이야기한다. 파괴적인 성과를 요구하는 것은 쉽다. 그 성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의 불확실성과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보다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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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파나마 보도 · Bartz v. Anthropic, 2025년 6월 23일 결정문. 법원은 이 사건에서 구매한 종이책을 디지털 사본으로 대체한 행위와 AI 학습을 위한 이용을 공정 이용으로 판단했지만, 불법 복제본을 확보해 범용 자료실에 보관한 행위는 별개로 보았다. 종이책 구매·스캔과 불법 복제본 확보를 같은 법적 문제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
Okdal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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