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내 수업에서는 비극이 펼쳐진다. 강의 공지를 올리면 전체 학생 중 삼 할은 클릭조차 하지 않는다. 세 번이나 설명했음에도 학생들은 생전 처음 듣는 소리인 양 가만히 앉아 눈만 껌뻑거린다.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말조차 없다. 그냥 앉아 있다.

가르치는 입장에서 학생들이 공지를 읽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태도 점수에 공지 이행 여부를 반영하는 것이다. 성적 이야기가 나오면 동태 같던 눈이 반짝거린다. 게으른 교수는 성적을 무기로 학생들이 전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게 만들고, 학생은 별 의미도, 재미도 느끼지 못한 채 성적을 위해 수업을 듣는다. 비극이다.

사실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성적만 한 지표도 없다. 어린 왕자에서 보여준 것과 같이, 우리 어른들은 숫자나 감투를 참 좋아한다. ‘침착맨, 언더테일, 치이카와를 좋아하는 옥달토’라고 설명하면 그 사람이 누군지 도통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카이스트 박사과정, 서울대학교 출강, AI 아티스트 옥달토’라고 설명하면 비로소 야, 그것 참 훌륭한 사람이로구나 하고 박수를 친다.

성적은 공부를 얼마나 잘했는지뿐 아니라 얼마나 성실한지, 얼마나 주어진 일을 잘 수행하는지, 얼마나 조직의 규칙에 잘 적응하는지도 짐작하게 해준다. 사람을 일일이 알아볼 수 없는 사회에서 성적은 꽤 편리한 지표다. 그래서 성적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장학금을 탈 때나, 대학원에 진학할 때, 취업할 때, 부모님이 교회에 가서 자식 자랑을 할 때도 유용하게 사용된다.

그러니 학생들이 성적에 민감한 것은 당연하다. 비난조로 이야기했지만, 학생들을 탓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당장 나부터도 성적과 학벌과 경력을 열심히 쌓아온 사람이다. 그런 내가 학생들에게 성적에 연연하지 말고 배우는 즐거움을 느껴보라고 이야기한다면, 참으로 배부른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한다.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더 뛰어난 기술을 익히고, 남들보다 우수한 성적을 받아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다. 공부는 즐거울 수도 있지만, 즐겁지 않더라도 해야 하는 ‘쓸모’가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인간이 오랫동안 공부하고 훈련해야 얻을 수 있었던 능력들을 기계가 하나둘 대신하기 시작했다. 수학 문제를 풀고, 코드를 작성하고, 그림을 그리고, 논문을 쓰는 일까지. 인간이 수년간 훈련해서 얻는 능력들을 AI가 훨씬 저렴하고 빠르게 제공할 수 있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열심히 공부해서 얻으려 했던 능력의 경제적 가치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노벨상을 받았다. 야, 그것 참 대단한 상을 받았구나. 그런데 파인만은 노벨상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는 새벽에 노벨상 수상 소식을 전하는 전화를 받자, 지금이 몇 시인데 전화를 하느냐고 불평한 뒤 끊어버렸다. 그는 자신이 이미 상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자연의 원리를 발견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이 그에게는 보상이었던 것이다.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사실 자체가 기뻤던 것이다.

나도 그런 즐거움을 안다. 며칠 동안 고민하던 문제가 풀리는 순간, 갑자기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이는 기분이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논문이 되지도 않고, 돈이 되지도 않더라도 재미있는 일은 재미있다. 하지만 모두가 파인만처럼 살자고 하기에는 현실적인 문제가 많다. 학생들에게는 학점이 필요하고, 연구자에게는 논문이 필요하고, 노동자에게는 소득이 필요하다. 아무리 발견하는 일이 즐겁더라도 그 즐거움만으로 월세를 낼 수는 없다. 우리는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고, 그 대가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AI의 발전은 이런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다. 인간이 오랜 시간 공부하고 훈련해서 얻었던 능력을 기계가 훨씬 효율적으로 제공하게 된다면, 인간이 직접 생산해야 할 쓸모는 점차 줄어들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더 유용한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했지만, 앞으로는 유용함과 무관하게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것이고, 사실 정도의 차이이지 어느정도는 이미 그렇게 됐다고 느껴진다.

여기에는 경제적인 문제가 남아 있다. AI가 아무리 많은 부를 생산하더라도 그 부를 소수가 독점한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여전히 생존을 위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할 것이다. 심지어 인간의 노동은 필요 없어졌는데 생활비는 여전히 벌어야 하는, 지금보다 더 큰 비극이 찾아올 수도 있다. 결국 AI가 만들어 낸 풍요를 어떻게 나눌 것인지가 중요해진다.

그 문제까지 해결되어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자신의 쓸모를 증명할 필요가 없어진다면, 배움과 노동을 대하는 태도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새로운 정리를 발표하는 것이 무의미해지기에 오히려 순수하게 수학을 공부할 수 있고, 작품을 팔지 않아도 살 수 있기에 오히려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거나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다. 더이상의 경제적 보상은 무의미해진다. 그럼 남는 것은 의미 뿐이다. 무언가를 잘해서 얻는 보상보다 그 일을 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학교도 지금과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학교는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기도 하지만 학생들의 능력을 평가하고 줄 세우는 곳이기도 하다. 학생들은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공부한다. 나 역시 학생들에게 점수를 매기며 그 일에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유능한 노동자를 길러내고 그 능력을 평가하는 역할이 무의미해진다면, 학교에는 배우고 가르치는 일 자체가 더 많이 남게 될 것이다. 학생들도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보다 정말 궁금하고 재미있어서 수업을 들으러 올 것이다.

그때가 오면, 성적을 무기로 학생들을 협박하지 않아도 된다. 공지를 읽지 않았다고 화낼 이유도 없을 것이다. 학생들이 배우고 싶어서 찾아왔으니, 나는 그저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함께 이야기하면 된다. 생각만 해도 즐겁다.

물론 그 정도로 뛰어난 AI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대학이 지금과 같은 규모로 유지될지는 모르겠다. 학생들이 굳이 대학에 다닐 이유도, 학교가 나를 강사로 고용할 이유도 줄어들 것이기에. 고용이라는 형태가 될지도 의문이다.

그럼에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알아내고, 그걸 뒤트는 건 아주 재미있는 일이다. 강의도 마찬가지다. 성적이 아무런 쓸모가 없어지더라도 내 강의를 들으러 올 사람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처럼 무언가를 배우는 일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전히 있을 테니까. 숫자는 좀 줄어들겠지만.

그래서, 쓸모를 증명할 필요가 사라져 가는 이 순간이 어쩌면 비극이 아니라 비극을 끝내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