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감각기관으로 세계를 받아들이지만, 그 감각이 곧 세계 자체에 대한 인식은 아니다. 우리 내부에는 세계를 해석하는 모델이 존재한다. 얼굴을 얼굴로 알아보고, 풍경을 풍경으로 분류하고, 말투에서 감정을 추론하고, 이미지에서 의도를 읽는다. 우리가 본다고 말하는 것의 대부분은 사실 우리 내부의 모델이 수행하는 예측과 보정과 압축의 결과다.

우리는 누군가의 얼굴을 볼 때, 눈, 코, 입의 픽셀 정보를 하나하나 계산하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의 모델을 사용한다. 우리는 어떤 표정을 슬픔으로, 어떤 자세를 피로로, 어떤 색감을 따뜻함으로, 어떤 구도를 안정감으로 읽는다. 이것은 세계가 원래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라기보다, 우리가 세계를 그렇게 압축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이해란 단순히 정보를 많이 아는 상태가 아니다. 이해란 복잡한 세계를 더 짧은 규칙으로 압축하는 능력에 가깝다. 무질서해 보이는 것에서 패턴을 발견하고, 서로 떨어져 있어 보이는 사건들을 하나의 구조로 묶고, 많은 감각 데이터 속에서 중요한 차이만 남기는 것. 우리가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세계를 다룰 수 있는 형태로 줄여 쓰는 일이다.

정보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예술은 정보와 노이즈의 보간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정보 이론에서 정보란 불확실성을 줄여 주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상상하던 가능한 세계의 경우의 수가 줄어든다면, 그만큼의 정보가 전달된 것이다. 반대로 이미 거의 확실하다고 믿고 있던 사실은 새롭게 알려져도 정보량이 낮다. 내일 해가 뜰 것이라는 말이 별로 놀랍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를 수식으로 적으면, 확률 $p(x)$로 일어나는 사건 $x$가 전달하는 정보량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I(x) = -\log p(x)\]

거의 확실한 사건($p \to 1$)은 $I(x) \to 0$으로 정보량이 0에 가깝고,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사건($p \to 0$)일수록 정보량이 커진다. 그리고 정보 이론에서 엔트로피는 아직 결과를 모르는 상태에서의 평균적인 불확실성, 즉 이 정보량의 기댓값으로 정의된다.

\[H(X) = -\sum_{x} p(x)\log p(x) = \mathbb{E}[-\log p(X)]\]

모든 결과가 똑같이 그럴듯할 때 엔트로피는 최대가 되고, 결과가 하나로 거의 확정되어 있을 때 엔트로피는 0에 가까워진다.

예술 작품 또한 작가의 의도나 감정을 전달하는 정보 매개체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예술 작품은 종종 높은 해석적 불확실성을 가진다. 그러나 그 불확실성은 순수한 무작위성의 불확실성과 다르다. 좋은 작품의 불확실성은 완전히 흩어진 노이즈가 아니라, 관객이 붙잡을 수 있는 구조 주변에서 발생한다.

나는 예술 작품과 수학 공식을 가장 잘 구분하는 기준이 정보의 전달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예술 작품에서 의도나 감정은 (대체로) 직접적인 방식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의도나 감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노이즈와 섞어서, 정확한 정보 전달을 방해하고, 관객이 작품을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한다. 이는 해석의 불확실성을 늘리는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정보가 명확히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관객의 다양한 감상이 가능한 것이다. 수학 공식이 가능한 한 오해를 줄이는 방향으로 정보를 압축한다면, 예술 작품은 오히려 일정한 오해와 지연과 모호성을 남기는 방식으로 정보를 압축한다.

그렇다고 해서 불확실성이 많기만 하면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완전히 무작위적인 노이즈 이미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압축하기도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엔트로피는 높을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깊은 예술 경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거기에는 해석 가능한 구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너무 뻔한 이미지는 구조는 있지만 정보량이 낮기에 우리가 가진 모델 안에서 쉽게 처리할 수 있다.

예술은 이 둘 사이에서 발생한다. 너무 낯설어서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너무 익숙해서 정보를 전달하는 데 실패하는 것도 아니다. 좋은 작품은 관객이 이미 가진 모델에 접속할 만큼 익숙하지만, 동시에 그 모델이 실패하도록 만들 만큼 낯설다.

그리고 이러한 실패는 때로 우리가 가진 모델의 변화를 가져온다. 어떤 작품은 단순히 이해되고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한 뒤부터 더 오래 작동한다. 한 번 그 구조를 알아버리면, 이후의 세계가 그 구조를 통해 다시 보이기 때문이다. 즉, 세상을 해석하는 우리의 모델을 수정하는 것이다.

테드 창의 단편 ‘이해’는 이 문제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사고 이후 지능이 급격히 상승한다. 세계는 이전과 다른 해상도로 보이고, 인간의 행동과 언어와 욕망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해’에서 이해는 안전한 능력이 아니다. 주인공은 자기 자신까지 포함한 시스템을 너무 정교하게 모델링하기 때문에 다른 똑똑한 존재가 만들어낸,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이미지를 이해해버리고, 최후를 맞는다. 그 이미지를 이해할 만큼 똑똑했기 때문에 최후를 맞은 것이다.

예술 또한 이와 유사하게, 메시지보다 더 깊은 층위에서 작동한다. 보통의 메시지는 어떤 내용을 전달한다. 그러나 강한 예술은 내용을 전달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이후의 내용을 해석하는 규칙을 바꾼다. 작품은 관객에게 이렇게 생각하라고 말하기보다, 관객이 생각하는 방식 자체에 개입한다.

정보 이론의 관점에서 이 현상을 해석하자면, 예술은 관객의 사전분포를 교란하고, 특정한 예측 오류를 발생시켜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을 바꾼다고 할 수 있다.

관객이 작품을 보기 전에 가진 믿음을 사전분포 $p(\theta)$라 하고, 작품이라는 관측 $x$를 받아들인 뒤의 믿음을 사후분포 $p(\theta \mid x)$라 하면, 둘의 관계는 베이즈 정리로 쓸 수 있다.

\[p(\theta \mid x) = \frac{p(x \mid \theta)\, p(\theta)}{p(x)}\]

이때 작품이 관객의 모델을 얼마나 바꾸었는가, 즉 사전분포에서 사후분포로의 갱신량은 두 분포 사이의 쿨백-라이블러 발산으로 측정할 수 있다.

\[D_{\mathrm{KL}}\!\left(p(\theta \mid x)\,\big\|\,p(\theta)\right) = \sum_{\theta} p(\theta \mid x)\log\frac{p(\theta \mid x)}{p(\theta)}\]

너무 뻔한 작품은 $p(x\mid\theta)$가 사전분포와 잘 들어맞아 이 값이 0에 가깝고(모델이 바뀌지 않는다), 너무 낯선 노이즈는 예측 오류가 크지만 붙잡을 구조가 없어 갱신이 일어나지 못한다. 예술은 이 발산이 유의미하게 크면서도 관객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에서 발생한다.

사전분포란 우리가 세계를 보기 전에 이미 가지고 있는 기대값이다. 사람은 이렇게 생겼을 것이다. 사랑은 이런 감정일 것이다. 풍경은 이렇게 아름다워야 한다. 이미지는 깨끗해야 한다. 오류는 제거되어야 한다. 이야기는 어떤 방식으로 끝나야 한다.

좋은 예술은 바로 이 기대값을 공격한다. 그러나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는다. 접속 가능한 정도의 익숙함을 남겨 둔 채, 그 내부에서 예측을 어긋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어긋남은 관객 내부의 모델을 수정하도록 유도한다. 바이러스가 숙주의 시스템에 침투해 자기 코드를 실행하듯, 작품은 관객의 내부 모델 안에서 작동한다. 그리고 한 번 작동하기 시작한 작품은 작품 바깥의 세계까지 바꾸어 놓는다.

그러므로 예술의 힘은 단순히 아름다움에 있지 않다. 예술의 힘은 감상 이후에도 계속 남아, 우리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에 개입한다는 데 있다. 어떤 작품은 본 직후보다 시간이 지난 뒤 더 강해진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장면이 어느 날 다른 경험과 연결되고, 그 순간 작품은 다시 실행된다. 예술은 종료된 파일이 아니라 백그라운드에서 돌아가는 프로세스에 가깝다.

이런 관점에서 감상은 안전한 소비가 아니다. 우리는 작품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작품도 우리를 조정하고 있다. 우리는 작품을 해석하지만, 작품은 우리의 해석 장치를 수정한다. 우리가 작품을 이해하는 순간, 작품은 우리 안에서 세계를 다시 이해하는 새로운 규칙이 된다.

예술은 인간 내부 시스템에 들어와 세계를 해석하는 규칙을 바꾼다. 그래서 예술은 장식이 아니라 침투이고, 표현이 아니라 감염이며, 감상은 느린 해킹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