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에 인스타 스토리에 쓴 글을 옮겨왔습니다.

MIT 연구진은 최근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했다. 모델이 충분히 커지고, 충분히 많은 데이터를 학습하면 서로 다른 신경망들의 내부 표현이 점점 닮아간다는 것이다. 아키텍처도 다르고, 학습 목표도 다르고, 데이터도 완전히 같지 않은데 결국 비슷한 표현 구조에 수렴한다는 관찰이다. (The Platonic Representation Hypothesis, Huh et al., 2024)

이 가설은 자연스럽게 철학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우리가 의미라고 부르는 것은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 아닐까?

플라톤은 현실 너머에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우리가 사물을 이해하는 것은 그 이데아를 어렴풋이 포착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현대의 딥러닝 모델이 서로 독립적으로 학습하면서도 점점 유사한 표현 기하학을 형성한다면, 그것은 세계가 이미 어떤 구조를 갖고 있고, 충분히 강력한 학습자는 그 구조를 재발견하게 된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이를 지도 제작에 비유할 수 있다. 위성으로 측량하든, 도보로 탐사하든, 음파로 탐지하든, 결국 정밀도가 높아질수록 지도는 서로 닮아간다. 지도 제작자들이 협의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고 있는 영토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연구에서 측정된 표현 정렬 점수는 완벽한 일치와는 거리가 멀다. 수렴의 경향은 보이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더구나 대부분의 모델은 비슷한 트랜스포머 구조와 유사한 인터넷 데이터를 사용한다. 이것이 세계의 구조 때문인지, 아니면 AI 연구의 방법론적 동질성 때문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또한 서로 다른 감각은 서로 다른 정보를 담는다. 텍스트는 색을 직접 전달하지 못하고, 이미지는 문법을 설명하지 않는다. 음악의 감정은 언어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다. 이런 정보 비대칭은 수렴에 구조적 한계를 둘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은 남는다. 만약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학습한 지적 시스템들이 독립적으로 대칭성, 원인과 결과, 수 같은 개념을 재구성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관습을 넘어선 어떤 좌표계가 존재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모델은 단지 패턴을 암기하는 기계일까? 아니면 세계의 구조를 압축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오랫동안 이데아라고 불러온 무언가를 다시 발견하고 있는 것일까?

아직은 모르지만, 적어도 이제 이렇게 물을 수는 있게 됐다. 의미는 우리가 만든 것인가? 혹은 우리가 계속해서 찾아내고 있는 것인가?


앞의 글을 쓰고 생각하다 보니 문득 원숭이 타자기의 비유가 떠올랐다.

원숭이에게 타자기와 무한한 시간을 주면, 그 원숭이가 랜덤하게 써내려가는 수많은 텍스트의 공간에 셰익스피어 희곡 또한 포함될 수 있다는 이야기.

이 비유는 앞선 질문과 맞닿아 있다. 햄릿은 창조된 것일까, 아니면 문자 조합의 거대한 가능성 공간 어딘가에 이미 존재하던 구조였을까? 만약 모든 가능한 문장이 이미 조합 공간 안에 포함되어 있다면, 창작은 무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행위가 아니라 거대한 잠재공간에서 특정한 구조를 찾아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 생각은 비트코인 채굴을 떠올리게 한다. 비트코인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값을 계산을 통해 찾아내는 것이다. 규칙은 이미 주어져 있고, 해답은 가능성 공간 어딘가에 있다. 채굴자는 그것을 발견할 뿐이다.

수학자도 비슷하다. 공리계가 주어지면, 그 안에서 참인 명제는 이미 정해져 있다. 정리는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증명을 통해 드러난다.

그렇다면 예술은 어떨까?

영화를 만드는 사람, 안무를 만드는 댄서, 음악을 쓰는 작곡가. 이들 역시 감정/리듬/서사/시각 균형이라는 거대한 잠재공간을 탐색하는 채굴자일지도 모른다. 완전히 무작위로 조합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게 공명하는 구조를 찾아가는 탐사자.

여기까지 생각하면 창작은 점점 발견에 가까워 보인다.

그럼 만약 모든 가능한 작품이 잠재공간 어딘가에 이미 존재한다면, 그 가치의 근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희소성일까? 하지만 무한한 원숭이의 세계에서 희소성은 사라진다. 계산 비용일까? 수십 년 사유 끝에 발견한 정리는 그 탐색 비용 때문에 가치가 있는 걸까? 아니면 구조적 아름다움일까? 압축 가능하고,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패턴이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걸까?

어쩌면 가치는 잠재공간에 박혀 있는 광석이 아니라, 구조와 의식이 만나는 순간에 발생하는 사건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빛과 소리의 배열일 뿐이지만, 관객의 기억과 경험과 감정과 연결될 때 비로소 의미가 된다. 춤은 제한된 신체의 운동이지만, 그 리듬이 타인의 신경계와 동조할 때 아름다움이 생긴다. 수학 정리는 기호의 배열이지만, 그 관계가 인간에게 유의미할 때 빛을 발한다.

그렇다면 창작은 단순한 채굴이 아니라, 잠재공간의 구조를 꺼내 타인의 의식과 공명시키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이데아가 존재하느냐는 질문은 조금 바뀐다. 이데아는 고정된 물체처럼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구조와 탐색자의 인식이 만날 때 반복적으로 안정화되는 패턴일지도 모른다.

구조는 발견될 수 있다. 하지만 가치는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완성된 의미로 가득 찬 창고가 아니라, 잠재적 구조로 가득 찬 공간이고, 의미는 그 공간을 가로지르는 존재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생성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지금 이 글도 마찬가지다. 이 문장들은 어딘가의 가능성 공간에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가 되는 순간은 누군가의 의식과 만날 때다. 그렇다면 결국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우리는 이데아를 발견하고 있는가? 아니면 관계를 통해 세계에 의미를 계속 생성하고 있는가? 혹은, 그 둘은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일까?